AI가 삼킨 200만 달러의 꿈… 출판계를 뒤흔든 '제리 팔라데 스캔들'
14곳 출판사가 앞다퉈 탐낸 데뷔작, AI 의혹 하나로 하루아침에 무산… 전문가들 "검증 시스템 부재가 근본 문제"
"제리 팔라데는 우리와 전 세계 출판 전문가들을 매료시킨 놀라운 원고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고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됐다"
[SNS 타임즈- LA]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제리 팔라데의 에이전시가 지난주 여러 출판사에 보낸 이메일의 일부다. 200만 달러(약 28억 원)에 달하는 데뷔작 출간 계약이 작가 본인의 에이전트 손에 의해 철회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출판업계는 또 한 번 인공지능(AI)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가 된 작품은 범죄소설 『콜 미, 아일 하이드 더 바디(Call Me, I'll Hide the Body)』다.
14개 출판사가 경쟁 입찰에 뛰어드는 이른바 '옥션'을 거쳐 미국에서는 맥밀런 산하 미노타우르가, 영국에서는 하퍼콜린스가 판권을 확보했을 만큼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었다.
팔라데의 미국 측 에이전트인 마크 제럴드는 지난 6월 처음 원고를 읽었을 때 "모두가 사랑에 빠질 만큼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사 과정에서 한 편집자가 AI 사용 가능성을 제기했고, 지난달 29일 있었던 면담에서 "작가 측 설명의 일부 내용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결국 에이전시는 원고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팔라데 측은 계약 초기 단계에서 AI 사용 여부를 확인했고, 당시에는 작가의 해명을 신뢰해 원고 집필이나 편집 과정에 AI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이를 더는 입증할 수 없다고 판단해 계약을 철회했다는 것이 에이전시 측 설명이다.
팔라데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결백을 주장하며, 이번 사건이 인종적 편견에서 비롯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올해 들어 유력 출판 계약을 따낸 흑인 작가 세 명이 모두 이후 AI 사용 의혹으로 계약이 취소되거나 흔들리는 일을 겪었다며, 흑인 작가의 작품이 주목받으면 그 즉시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부터 받는 반면 AI 활용을 공개적으로 밝힌 백인 작가들은 별다른 타격 없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ChatGPT가 등장하기 전인 2021년에 주고받은 문자와 이메일 일부를 인스타그램에 공개하며 자신이 AI 없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을 입증하려 하고 있다. 미 서던메소디스트대(SMU) 대학원생이기도 한 팔라데는 이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자료 조사 목적으로만 AI를 활용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으며, 이미 여러 편집자와 심사팀이 원고를 읽었는데도 AI의 흔적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번 사태는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로 불거진 유명 AI 표절·대필 의혹이다. 앞서 미아 밸러드의 소설 『샤이 걸』이 같은 이유로 출간이 중단됐고, 자가출판으로 먼저 나온 H.M. 울프의 『대거마우스』 역시 AI 논란이 제기됐지만 사이먼 앤드 슈스터를 통해 7자리 수(억대) 계약으로 정식 유통이 예정돼 있다.
출판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업계의 구조적 허점이 드러났다고 입을 모은다. 저자 브랜딩·홍보 회사 KMSPR의 대표 캐슬린 슈미트, 소설가이자 새라로렌스대·컬럼비아대 창작 교수인 링컨 마이클, 작가 겸 칼럼니스트 존 폴 브래머 세 사람은 온라인 매체 '언스택트(Unstacked)'가 마련한 좌담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슈미트는 14명이나 되는 편집자가 같은 원고를 검토하고도 경쟁적으로 입찰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업계의 검증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출판 과정에는 애초에 통일된 사실 확인이나 AI 검사 정책이 없으며, 결국 편집자와 에이전트 개개인의 경험과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는 이번 사건에 앞서 『대거마우스』를 둘러싸고도 유력지 애틀랜틱이 문제를 제기했고, 당시 AI 판별 프로그램 '팽그램(Pangram)'에서 60%의 AI 작성 가능성 점수가 나왔던 사실을 언급하며, AI 판별 기술이 아직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를 섣불리 의심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도 짚었다.
팽그램은 글이 사람이 아닌 생성형 AI(거대언어모델·LLM)에 의해 작성됐을 가능성을 수치로 산출해주는 소프트웨어로, 최근 출판·학계 등에서 표절이나 대필 의혹을 검증하는 용도로 널리 쓰이고 있다.
마이클 역시 이번 일이 놀랍다기보다는 예견됐던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출판사가 아니라 에이전트 스스로 상당한 수수료 수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원고를 회수했다는 점에서, 업계 관계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큰 스캔들을 예상하며 불안해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원고를 직접 읽지 않은 상태에서 결백을 주장하는 작가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업계지 퍼블리셔스 런치의 보도를 인용해, 그동안 여러 출판사가 조용히 원고 회수나 재작성을 요구한 사례가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훨씬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학에서 학생 과제의 AI 작성 여부를 가려내는 표절 검사 프로그램조차 자주 무력화되는 것처럼, 생성형 AI는 기존의 탐지 시스템을 피해 가는 데 능하다는 설명이다.
브래머는 최근 커먼웰스 단편소설상과 문예지 그란타를 둘러싼 논란을 함께 거론하며, 업계 전체에 정교한 독해 문화가 부족하다는 점이 AI 시대에 와서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AI가 만들어내는 문장에는 일종의 '전형적인 문체'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예컨대 벤치나 바위 같은 무생물에 의인화된 감정을 과도하게 부여하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에이전시가 거액의 수수료를 포기하면서까지 계약을 철회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슈미트에 따르면 팔라데의 에이전시가 포기한 수수료만 30만 달러(약 4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처럼 이례적으로 공개적인 대응이 오히려 계약 당사자 간 신뢰 관계나 비밀 유지 원칙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내놓았다.
마이클은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AI로 인한 '창작물의 양적 과잉' 문제로 짚었다. 생성형 AI가 값싸게 대량의 글을 찍어낼 수 있게 되면서 아마존 킨들 언리미티드 같은 플랫폼이 이미 이른바 'AI 슬롭(AI 저품질 양산물)'으로 넘쳐나고 있으며, 앞으로는 독자들이 아예 개인 맞춤형 AI 이야기를 구독하는 방식으로 소비 패턴이 옮겨갈 수 있다는 전망이다. 그런 만큼 문학 출판사들이 살아남으려면 '사람이 직접 쓴 글'이라는 가치를 분명한 정체성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팔라데의 행보에 대해서도 다양한 전망을 내놓았다.
브래머는 이 같은 사례가 앞으로 더 자주 발생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실제로는 결백한 작가가 억울하게 여론의 뭇매를 맞는 상황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만약 팔라데가 저작권을 입증한다면 오히려 이번 논란이 불러온 화제성 덕분에 다른 대형 출판사가 관심을 보일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슈미트는 팔라데에게 자가출판을 서두르라고 조언하고 싶다면서도, 이번에 논란이 된 작가들이 모두 유색인종이라는 점은 업계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AI가 글쓰기 도구로서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오갔다.
마이클은 맞춤법 검사기처럼 AI를 보조 도구로 쓰는 것과, 최근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한 로맨스 소설 작가처럼 45분 만에 소설 한 권을 AI로 완성해버리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핵심은 AI 사용 자체가 아니라, 이를 숨기거나 속이려 드는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슈미트 역시 업계 차원의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본인도 업무 보조를 위해 AI 비서 서비스인 '클로드 코워크(Claude Cowork)'를 계약서·인보이스 관리 등 행정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팽그램처럼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는 AI 판별 도구가 잘못된 '거짓 양성' 판정을 내려 죄 없는 작가에게 낙인을 찍을 위험도 함께 우려했다.
세 사람은 그러나 AI가 문학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지는 못했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마이클은 5년 전과 지금의 신간 서점 매대를 비교해도 AI로 인한 눈에 띄는 변화는 감지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학생들의 과제 작성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대학 강의실만큼은 이미 AI로 인한 '전면적인 위기' 상태라고 지적했다.
슈미트는 대중이 정치·사회적 허위 정보에도 쉽게 휩쓸리는 현실을 볼 때, 안목이 낮은 독자일수록 AI가 쓴 책에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향후 5년 뒤 출판업계 지형에 대한 전망도 나왔다.
슈미트는 출판사들이 연대해 통일된 AI 정책과 교육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은 일부 독자층은 사람 개입 없는 AI 생성물을 그대로 즐기게 되겠지만, 다수의 독자는 여전히 사람이 직접 쓴 글과 예술을 찾게 될 것이라 전망하면서도, AI 사용 사실을 속이다 발각된 작가를 둘러싼 스캔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진 작가들의 처지에 대한 우려도 이어졌다.
마이클은 AI가 쏟아내는 방대한 투고량이 에이전트의 원고 검토함이나 문예지의 투고함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밀어붙일 것이라며, 결국 인맥과 추천 중심의 폐쇄적인 등단 구조가 굳어질 위험을 지적했다.
브래머 역시 트위터(X) 전성기 시절 무명 작가들이 편집자와 직접 소통하며 등단하던 통로가 사실상 사라진 지금, 젊은 작가들이 설 자리가 더욱 좁아지고 있다고 우려하면서도 최근 늘고 있는 소규모 독립 문예지나 오프라인 창작 모임 같은 커뮤니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팔라데는 변호인을 선임해 법적 대응에 나섰으며, 이번 사건이 그의 작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출판업계가 AI 판별과 검증 체계를 어떻게 다시 세워나갈지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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