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어디로 부터 오나, 뇌는 단순 전달자?
"뇌는 생각하지 않는다" 슈타이너 가설 vs. 신경과학 '생각과 의식, 신경 활동 의존' 학계 폭넓은 합의.
[SNS 타임즈] "당신의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물음에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뇌"라고 답한다.
그런데 최근 뉴스레터 플랫폼 서브스택(Substack)에서 이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는 글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인지학 계열 필진이 운영하는 '스피리추얼 사이언스 인사이트(Spiritual Science Insights)'가 최근 올린 글로, 오스트리아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의 관점을 빌려 "뇌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글의 중심에는 두 가지 비유가 있다.
연못에 담근 주전자가 물을 만들지 않고 퍼 올릴 뿐이듯, 뇌도 지성을 생산하는 기관이 아니라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지성을 모아 사람이 쓸 수 있게 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거울이 얼굴을 만들지 않고 비출 뿐이라는 비유도 같은 맥락이다.
글은 슈타이너가 뇌라고 할 만한 기관이 거의 없는 송장벌레와 말벌의 정교한 행동을 근거로 들어, 지성이 뇌의 산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소개한다.
독립적인 사고에는 물리적 뇌만으로 부족하고 '에테르체'라는 영적 구조가 깨어나야 한다는 대목, 현대인의 추상적 사고가 영적 세계와 단절된 '죽은 생각'이 됐다는 진단도 담겼다. 글은 생각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 뇌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의 내적 활동과 집중이라고 결론짓는다.
슈타이너는 인지학과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로, 한국에서도 대안교육과 바이오다이나믹 농법 등을 통해 이름이 알려져 있다. 다만 그의 주장은 실험과 관찰로 검증된 이론이 아니라 스스로 '정신과학'이라 부른 영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다. 에테르체 같은 개념은 현재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주류 신경과학의 입장은 분명하다. 뇌졸중이나 외상으로 특정 부위가 손상되면 언어와 기억, 성격이 달라지고, 전신마취를 하면 의식이 사라지며,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특정한 경험이 유발된다는 증거가 오랫동안 쌓였다.
생각과 의식이 신경 활동에 의존한다는 점에는 학계의 폭넓은 합의가 있다.
곤충 사례도 마찬가지다. 작은 신경계를 가진 곤충의 복잡한 행동은 본능과 학습, 제한된 신경 회로의 조합으로 설명하는 연구가 많다. 뇌가 작다는 사실이 뇌 바깥의 지성을 끌어 쓴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질문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다.
신경 활동이 어떻게 '무언가를 느끼는 경험'으로 이어지는가라는 물음,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0년대에 '의식의 어려운 문제'라 이름 붙인 과제는 여전히 답이 없다.
뇌를 의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필터나 전달 장치로 보는 관점도 새롭지 않다.
19세기 말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와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비슷한 취지의 주장을 편 바 있다. 다만 이는 철학적 가설이며 신경과학계에서는 소수 의견이다.
가설이 성립하려면 어떤 관찰로 확인할 수 있는지가 제시돼야 하는데, 지금까지 검증 가능한 예측이 나오지 않았다는 비판이 따른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물음이 다시 호출되는 데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거대언어모델이 글을 쓰고 추론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생각이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가 기술 논쟁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생각이 물질 구조의 산물이라면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지, 아니면 생각에는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이 있는지를 묻게 된 것이다.
슈타이너의 주전자와 거울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라기보다 질문을 되살리는 장치에 가깝다. 어느 쪽을 택하든, 생각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뇌과학과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더 무겁게 우리 앞에 놓이고 있다.